열린 알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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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서 함께, 협동조합 이야기] 민들레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조합
"저에게 최후의 직장으로 남을 것입니다"
민들레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하 민들레) 나준식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민들레 이사장으로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넘쳤다. 몇 차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우리 지역에 든든한 뿌리를 내린 협동조합으로 거듭나기까지 나 이사장의 진정성 가득한 성찰과 발전 방향을 들어봤다."민들레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 조합의 출발"
민들레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은 2002년 창립돼 15년 동안 순항 중이다. 나 이사장은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교육, 의료, 주택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의료 분야는 의사 외에는 잘 모르는 영역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제도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대전에서는 한밭레츠를 통해서 의사와 한의사 등 의료인들과 주민들이 일상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시민과 의료인들이 평범한 생활 공간에서 함께 삶을 나누며 친밀하게 일상적인 관계를 맺었다. 의료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이웃으로 선후배로 동생으로 인간적인 관계에 바탕을 두고 친밀하게 존재했다. 의사들의 파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되었고, 의사와 환자로서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결코 남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으로 협동조합은 출발했다.민들레의 출발은 결국 협동이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만나서 이웃처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생각이 시작이었다. 당시 법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생활협동조합에 관한 한 특별법에 따라 문화 시설 운영 조항에 의거해서 민들레도 만들었다. 그래서 의료 생협 형태로 의사와 조합원이 만나고 협력하면서 십시일반 함께 운영하는 의료 기관으로 탄생했다. 이웃과 더불어 건강하게 관계를 맺으며 그저 단순하고 소박한 수준으로 협동조합이 탄생한 것이다.처음에는 300여 명 조합원과 함께 출자금도 적은 액수로 출발했다. 현재는 조직이 좀 커져서 3500세대, 만 명 이상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모든 분들을 알고 진료에 임하는 게 좋겠지만 숫자가 늘어 모르는 조합원이 생겨나고 익명의 관계가 형성되다 보니 그 분들의 생활이나 생각을 잘 모르고 협동이 가능한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조직이 커지니까 여러 층이 생기고, 괴리감이 생기고 에너지가 모아지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나 이사장은 염려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조직 속에도 사람들의 관계는 내 앞의, 내 옆의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포분열하듯이 확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5년 동안 수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새롭게 열정이 생기기도 하고 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시민 경제, 나눔 경제가 대두하면서 2012년도에 민들레는 우수 사회적 기업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우리는 당장 낫지 않는다고 하여 실력 없는 의사라는 오명을 쓰고, 경쟁에서 밀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의사와 이런 의료 행태에 길들여진 환자들의 요구로 항생제 남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환자는 의사에게 처방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 우선 자신의 현재가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상의하러 가는 것이다. 항생제 처방이나 주사라는 결과만을 주고 받는 진료와 의료 이용 행태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신뢰와 관계 맺기, 그리고 새로운 시도"나 이사장은 의사로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을 신뢰하는 조합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조합원이 신뢰하다 보니 얼마든지 관계맺기가 가능했다. 조합원이 동의하고 책임을 갖고 참여하는 모습이 민들레 협동조합의 존재 이유라고 설명한다. 나 이사장은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모험가였다. 2006년도부터는 진료에 명상 치유 프로그램을 넣어 운영하면서 약 5년 동안 암 환자나 알콜 중독자를 치유하기도 했다. 음악 듣고, 춤추고, 실컷 울게 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파급했다.나 이사장에게 우여곡절은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의원, 한의원을 같은 층에서 운영하면서 동시에 진료한 부분을 청구하거나, 노숙자를 위한 진료나 조합원들의 비급여 검진 부분을 보험 적용하기 위해 무리한 청구를 하여 행정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사익 추구가 아니고, 행정적인 무지로 인해 발생한 일이다 보니 그러한 상황에서도 조합원들이 나 이사장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모두 품어주었고, 협동 조합이 문을 닫거나 쪼개지지 않고 오히려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의사로서 민들레는 최초이자 최후의 직장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묻는단다. "왜 여기서 일하느냐?"고. 나 이사장은 자신의 모든 삶이 민들레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나 이사장은 민들레에서 개인적 욕망도 실현할 수 있고, 사회적 존재로서 민들레가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의료 전문가로서 역할하면서 신뢰를 해주는 조합원들이 있는 한 민들레는 자신에게 최적화된 공간이라는 것이다.민들레에 머물며 취미나 관심사를 나누는 것도 자유롭고, 누구든 함께 둘러싸여 마치 무지개처럼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리며 인생을 공유하고 나눈다. 민들레에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의사로서 전문가로서 조합원들에게 인정을 받고,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스트레스를 풀고 함께 간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직장 아닌가. 나 이사장은 차분하게 소회를 풀어냈다.그러면서 강조한다."나의 경우는, 받아가는 월급이 적더라도 내 자존감이 높아지면 된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일과 일상이 함께 하며 소소하게 느끼는 재미와 배움들이 민들레에 널려 있다. 내 인생 최초의 직장이자 최후의 직장이 될 것이다.""모험 속에 꽃 핀 내면 성찰, 이사장으로서 최선을 다 할 것" 나준식 이사장은 내과 전문의로서 자기 소개를 해달라는 질문에, "아직 많이 멀었다. 부족하다. 지 잘 난 맛에 산다. 그걸 알게 된 게 늦긴 했지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편해졌다. 그 동안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라며 그동안의 모험에 관해 풀어 놓았다.
대학 생활은 일탈의 시절이었다. 신입생이 되어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녔으며, 수업은 거의 땡땡이를 잘 쳤다. 학생회 운동권에 몸담고 시대 정신에 몰입하기도 했다. 무엇인가 나를 드러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면서 의사가 되고 환자를 보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니 조금은 뒤늦게 공부하는 일에 빠져 공부의 참가치를 터득하기도 했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에서 1등을 하기도 하고, 내과 중에서도 심장 내과를 선택한 것도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그런데 이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길이 아닌 듯 싶어 인도행을 작심했다. 병무청에 근무하는 동안 침을 배웠다. 그때 한밭레츠에서 한의사를 만났다. 인도행을 작심했을 때 한밭레트 회원들의 비판이 거셌다. 도망자 취급을 받았다. 레츠회원들과 상의 끝에 나 이사장은 인도행을 접고 대전에 정착하여 의료생협을 시작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공동 육아 한밭생협 활동, 노숙자 진료(벧엘의 집) 등을 거쳐 의료 생협 의사로서 제자리를 찾았다. 이후 대안학교인 '대전 꽃피는 학교'를 함께 설립하고 중, 고등 과정 설립을 거쳐 작년까지 법인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지역 사회의 인프라를 서로 연결하고 제공하는 시스템 마련 절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13144&CMPT_CD=SEARCH
협동조합은 공생, 순환의 가치로 지역사회를 만들어갑니다. 대전지역에도 수많은 협동조합이 다양한 사업과 방식으로 조합원의 권익 향상과 지역 사회 공헌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지원기관인 대전사회적경제연구원, 월간 토마토, 오마이뉴스의 공동 기획으로 대전지역 협동조합을 찾아갑니다.